<벌새>는 김보라 감독이 연출한 2019년 한국 독립영화로, 1990년대 서울을 배경으로 14살 소녀 은희의 일상을 조용하게 따라가는 작품입니다.
거대한 사건이나 극적인 전개 없이, 한 소녀가 겪는 사소한 감정의 파동과 그 속에서 조금씩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믿을 수 없을 만큼 섬세하고 진실하게 그려냅니다.
영화는 은희가 겪는 첫사랑, 가정폭력, 우정의 변질, 그리고 삶과 죽음이라는 사건을 통해 ‘살아가는 것’의 의미를 깊고 조용하게 탐구합니다.
이번 리뷰에서는 <벌새>를 다음 세 가지 주제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 흔들리는 세계 속 소녀의 마음
- 관계를 통해 비로소 알게 되는 자신
- 성장이라는 이름의 상처와 회복
1. 흔들리는 세계 속 소녀의 마음
영화 <벌새>는 주인공 은희(박지후 분)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은희는 중학교 2학년, 어른도 아이도 아닌 경계에 서 있습니다. 가족 안에서는 외면당하고, 학교에서도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학생입니다. 심지어 친구 관계에서도 어딘가 미묘한 거리감을 느끼며 외로움을 품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은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끊임없이 탐색합니다. 철없는 첫사랑에 가슴 설레고, 친구와의 다툼에 서운해하며, 가족의 무심함에 상처받으면서도 조용히 자신의 감정을 끌어안습니다.
이 영화의 탁월한 점은, 이러한 은희의 작은 감정 하나하나를 절대 과장하거나 설명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감독은 다만 카메라를 은희의 눈높이에 맞추어 놓고, 그녀가 세상을 어떻게 느끼고 받아들이는지 묵묵히 따라갑니다.
90년대 서울이라는 배경도 중요합니다. 한창 개발이 진행되던 송파 지역, 성수대교 붕괴 같은 실제 사건들이 배경으로 등장하며, 은희가 겪는 개인적 아픔과 사회가 겪는 커다란 상실이 조용히 연결됩니다.
은희의 세계는 늘 흔들립니다. 가족은 안전한 울타리가 아니고, 친구도 완전한 편이 아니며, 사랑 역시 보호막이 되어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은희는 묵묵히 살아갑니다. 작은 벌새처럼, 끊임없이 날개를 퍼덕이며 자신만의 생존 방식을 찾아갑니다.
이 영화는 그렇게 소녀의 내면을 따라가면서 우리 모두가 한 번쯤 겪었던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하는 시기’를 가장 섬세하게 그려냅니다.
2. 관계를 통해 비로소 알게 되는 자신
<벌새>는 은희와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를 통해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은희는 가족 안에서 늘 소외된 존재입니다. 폭력적인 아버지, 무관심한 어머니, 그리고 상처를 주는 오빠 사이에서 은희는 작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가족은 그녀에게 안정이 아니라, 불안의 원천입니다.
학교에서는 사소한 친구들과의 다툼이 끊이지 않습니다. 가끔은 배신도 경험하고, 가끔은 말 못 할 외로움에 시달립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특별히 중요한 관계는 바로 학원 선생님 영지(김새벽 분)와의 만남입니다. 영지는 은희에게 처음으로 조건 없이 지지와 관심을 보내는 어른입니다. 그녀는 은희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답을 강요하지 않으며, 존재 자체를 존중해 줍니다.
영지는 말합니다.
“괜찮아질 거야.”
이 짧은 한마디는 어쩌면 은희가 지금껏 누구에게도 듣지 못했던 말일 것입니다. 은희는 영지와의 만남을 통해 자신이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임을 처음으로 깨닫습니다. 그리고 이 깨달음은 비록 주변 상황은 변하지 않더라도, 은희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선을 조금씩 변화시키기 시작합니다.
<벌새>는 인간관계가 어떻게 사람을 파괴할 수도 있고, 또 동시에 구원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조용히 보여줍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성장담이자 치유의 이야기입니다.
은희는 아마도 앞으로도 계속해서 흔들릴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자신 안에 조금 더 단단한 중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느낄 수 있습니다.
3. 성장이라는 이름의 상처와 회복
영화 <벌새>의 가장 깊은 부분은, 성장을 ‘아름다운’ 과정으로만 그리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성장에는 아픔이 따릅니다. 상실과 슬픔, 고독과 외로움, 그리고 때로는 어쩔 수 없는 체념까지.
은희가 겪는 일련의 사건들, 첫사랑의 실망, 친구와의 이별, 가족 내 폭력, 영지 선생님의 죽음. 이 모든 경험은 은희를 조금씩 깨뜨립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깨진 틈으로 빛이 들어옵니다.
은희는 상처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며, 결국은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게 됩니다.
특히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은희가 지하철을 타고 멀어져 가는 장면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이 계속해서 나아간다는 상징처럼 다가옵니다.
성장은 거창한 변화가 아닙니다. 눈부신 성공이나 화려한 전환도 아닙니다. 그저,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것 같은 일상 속에서도 조금 더 깊이 자신을 이해하고, 조금 더 온전히 세상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
<벌새>는 그렇게 소리 없이, 하지만 분명히, 은희가 성장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관객들에게도 조용히 말합니다.
“당신도 그렇게 살아왔다.”
📝 결론: 작은 벌새가 날갯짓하는 순간
<벌새>는 화려하거나 극적인 장면 하나 없이도 보는 이의 마음을 뒤흔드는 영화입니다.
은희라는 소녀를 통해 우리는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고, 지금도 어딘가에서 버티고 있는 또 다른 벌새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삶은 때로 무겁고, 버겁지만, 우리는 매일 아주 작은 날갯짓을 하며 살아갑니다.
<벌새>는 그 조용한 생존의 아름다움을 가장 깊이 있게, 가장 섬세하게 보여준 작품입니다.
삶이 버겁게 느껴질 때, 이 영화 속 은희를 떠올려보세요.
그리고 마음속으로 이렇게 다독여 주세요.
“괜찮아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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